허지웅과 박완서,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

“여자였지만 젊음만으로도 더럽고 잔혹한 세월의 좋은 먹이였다. 세상이 바뀔 때마다 빨갱이로 몰렸다가 반동으로 몰렸다가 하면서 나는 내 눈엔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자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박해를 당하면서 그들 앞에서 벌레처럼 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 내 마음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게 없었다면 아마도 그 시절을 제정신으로 버텨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번득이는 섬광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등장시켜 이 상황을 소설로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예감만으로도 그 인간 이하의 수모를 견디는 데 힘과 위안이 되었다. 훗날 소설로 쓰기 위해 낱낱이 기억하려 했고 몸은 기면서도 마음은 최소한의 자존심이나마 포기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려고 했다.”

-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그 중에서도 “나는 왜 소설가인가”라는 글에서 박완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힘든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힘, 또 그 시절을 견딜 수 있다는 믿음, 그 시절을 증언하리라는 각오, 이런 것들 덕분으로 그녀는 이야기를 쓰고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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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살이었다. 군대를 제대했지만 복학하지 않았다. 등록금과 집세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건설현장에서 모래를 고르는 일부터 아무개 브랜드의 피팅모델까지 하루에 몇 개씩 닥치는 대로 일했다(나는 이 피팅모델 경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떠벌리는 경향이 있다. 나도 젊고 예뻤다……). 그러다 일확천금의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일이 텔레마케팅이었다. 아무튼 나는 입으로 하는 일에는 뭐든지 자신이 있었다.

 … 아침에 출근했더니 사무실 문은 잠겨 있었고 아이들은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보다 한 살이 더 많다는 이유로 대책위원장 비슷한 것이 되었다. 팀장을 찾아가봤지만 자기도 피해자라는 말 이외에 별게 없었다. 부장은 사무실 집기와 직원들의 두 달 치 월급을 챙기고 사라졌다. 경찰서와 노동청을 방문해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하면서 나는 참 마음이 복잡했다. 무엇보다 그 좋은 부장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허지웅, 『나의 친애하는 적』

또 허지웅은 힘든 시절 이야기를 이렇게 적는다. 등록금과 집세와 생활비를 벌었던 이야기. 건설현장 알바부터 돈 떼어먹힌 텔레마케팅 일까지. 시간이 지난다고 힘들었던 일이 안 힘든 일이 되진 않지만, 적어도 그것은 그의 이야기가 된다. 훗날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조각이 된다.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를 좀 더 가져와야겠다.

“… 그때의 치 떨리는 경험이 원경으로 물러나면서 증오가 연민으로, 복수심이 참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비로소 소설을 쓸 수 있었다.”

이후에 글로 쓰기 위해 낱낱이 기억하겠다는 증오심, 그 증오로 글을 쓰지 않았다. 작가는 증오가 연민으로, 이해로 바뀌면서 비로소 소설을 쓸 수 있었다 말한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우리에게는 좋은 날, 덜 좋은 날이 있고 그에 대해 쓸 것들이 많기도 많다. 우리 삶은 곧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은 꼭 책을 내는 작가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고, 아쉬운 점을 생각해 보고, 즐거웠던 점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우리 삶은 이야기가 되고 글이 된다. 못쓰고 잘쓰고는 문제가 아니다. 최근 나를 울컥하게 했던 『보고 시픈 당신에게』는 글을 쓰면 우리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고 쉽고 심플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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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세가 되어서야 한글을 배우고 글을 쓰기 시작한 김금섬 할머니의 <가족생각>.
 “가족생각” 글자마다에 담겨있는 하트♡가 애잔하다. 

이야기를 해보자. 늙은 오이를 무쳐서 밥을 먹은 이야기, 잡채를 무친 이야기.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해보자. 생각나는 말, 하고 싶은 말, 표현하지 못했던 말들, 이런 이야기들을 해보자. 가슴 아픈 이야기, 나누고 싶은 기쁜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다른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 시장에 가고 음식을 하고 산책을 하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우리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언제고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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