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어려운 겁니다

1.

나름 눈치가… 있다면 있는데, 이따금 공기를 못 읽는 자가 되곤 한다(空気よめない…). 이게 좀 곤란하기도 한 것이, 어떤 때는 눈치가 빠르.. 아니, 그냥 있는데, 어떤 때는 전혀 감도 못잡아서 사람들이 이 불균형에 놀라곤 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걸 몰라?’ 어떻게 그 명백한 분위기, 그 맥락을 못 읽냐는 공공연한 비난. “나에게는 그것을 읽고 해석할 탬플릿이 없다”는 말로 그 비난을 방어하기는 하지만, 나로서도 미스터리라면 미스터리다. 나도 내가 어렵다.
가까운 사이의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부분에서 언짢은지, 혹은 으스대고 있는지.. 이런 걸 알기 어렵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면 음… 어렵다. 왜냐하면, 상대가 말하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것, 침묵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의도하는 표정 외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읽고 이해한다는 건 이렇게 복합적이고 어려운 일이다.

‘읽는 법’을 배운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선뜻 내켜하지 않는다. 내가 글을 모르냐 뭣이 모자라냐, 지금까지 책 잘만 읽었는데 뭘 읽는 법을 배우냔 말이다… 하면서. 책을 읽는 것에 정해진 방법이나 답안 같은 거야 없지만, 그래도 그냥 줄글을 눈으로 따라간다고 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밑줄 좀 쳤다고 해서 반드시 책을 꼼꼼히 읽었다고 할 수만도 없다. 읽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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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삶의 조언이나 지혜로운 말 등이 항상 우화일 뿐이고, 일상생활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유일한 삶에는 사실상 유효하지 않다고 불평한다. 현자가 “넘어서 가라”라고 말할 때 그는 우리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있다면 얼마든지 갈, 어떤 실재하는 장소를 가로지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곳은 환상의 저 너머, 우리에게 미지인, 그조차 확실히 짚어내지 못할 그런 장소다. 따라서 바로 여기에 발딛고 있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 이 모든 우화들은 실제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우리가 매일같이 싸워야 하는 염려, 이건 또 다른 문제다.

한 남자가 말했다. 왜 그렇게 망설이죠? 그저 우화를 따라가기만 한다면 당신은 그냥 우화의 일부가 될 텐데. 그리고 일상의 걱정들은 모두 없앨 수 있을 텐데.

다른 이가 말했다. 장담하는데 이거 역시 우화일 거야.

첫 번째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두 번째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직 우화 안에서만 그렇지.

첫 번째 남자가 말했다. 아니요. 실제 삶에서요. 우화 안에서 당신은 졌어요.

-카프카

3.

토마스 핀천이나 카프카의 글을 읽으면 혼란스럽다. 이게 무슨 말이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뭘 잘못 읽었나? 몇 페이지를 돌아가서 다시 읽어보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카프카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이야기들은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우리에게 확인시킬 뿐이다. 읽지만 읽을 수 없다. 카프카는 또한 말했다.

“도대체 글을 쓴다는 게 애초에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할 말이 너무나도 많고 펜으로는 오로지 이야기된 것들의 거대한 덩어리에서 불확실하고 불특정한 흔적을 좇을 수 있을 뿐인데?”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스콧 피츠제럴드는 가족끼리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던 이에게 글쓰기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을 뒤흔든 것에 대해 써야 한다고. 그냥 가볍게 스치고 간 이야기는 저녁식사 자리에서나 하면 된다고. 진심으로 강렬하게 자신을 움직인 것을 쓰라고. 우리는 이야기를 왜 하고, 또 왜 읽는가를 가만 생각해 보게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4.

“소설의 의미 같은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소설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래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줄 거라는 낙관적인 희망을 품고 있다.’ (최정화, 『지극히 내성적인』작가의 말)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쓰여진 글을 읽는 걸까. 글 너머에서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정말 가능할까. 재미의 유무와 이야기의 설득력을 떠나 우리는 진짜로 글을, 사람을 읽을 마음이 있기는 한 걸까.

“…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화할 능력이 없다. … 주거니받거니 하는 대화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듣는 사람이 결국은 지쳐 ‘맞아’라고 맞장구치는 데 지겨워서 외면하는 동안에, 결국은 덧거리밖에는 안 되는 의견이 있을 뿐이다.”(찰스 백스터, 『서브텍스트 읽기』)

5.

잘 읽고 싶다. 이해하고 싶다. 의미를 살짝 숨겨놓았다면, 애써 찾아내고도 싶다. 노력과 연습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하고 싶다.

 

잘 읽는 연습, <크리에이티브 리딩>
왜 지금 읽는가? <이야기의 존재론>
“To be or not to be”를 마침내 이해하기 <셰익스피어 북클럽>
결을 느끼며 읽는 영어의 신세계 <영문학 번역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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