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어머니, 백주또

4월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하다가 7월 들어 거의 매일 시간을 쏟아부었던 마을그림책 프로그램이 끝났다. 기획부터 책 제작까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고 정성을 들인 프로그램이라 당분간은 그분들과 주고받은 에너지와 눈여겨볼 만한 삶의 자세들을 돌아보며 여운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여운 즐기기가 오래가지 못할 듯하다. 예전에 그림책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 분들이 기다렸다는 듯 상담과 원고 피드백을 신청해 왔다. 한편으론 이 또한 반가운 일이라, 지난 작품을 돌아보는 여운만큼이나 새로운 작품을 만난다는 설렘이 차오른다.
그러다 오늘은 품에서 안 떨어지려는 갓난쟁이 육아에 이도저도 못한다는 어느 수강생의 하소연을 들었다. 같은 기수 중에 이미 육아전쟁을 치러 본 분이 있어 도움말과 격려를 받고 있지만 창작 환경이 만만치 않으니 의욕이 떨어지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4개월 가까이 빠지지 않고 아이와 함께 마을그림책 수업에 참여한 젊은 엄마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때그때 아이를 어르며 앉거나 서서 자기 몫의 작업을 한 터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예삿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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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어머니의 존재와 역할이 대단해 보인다. 이쯤되니 이번주 이야깃감으로는 다른 이야기보다 대단한 제주의 어머니신 백주또 이야기가 더 어울릴 듯하다.

올림포스 신들만큼 제각각 특징을 지닌 제주의 마을신들

제주에는 마을마다 모시는 신들이 따로 있다. 농사짓는 데 도움을 주는 농경신, 바다를 지켜주는 해신, 임신과 출산 육아를 돕는 산육신, 병을 고쳐주는 치병신까지 저마다 주특기를 가진 신들을 모시며 마을 곳곳의 생활과 안전을 기원한다. 이런 마을신들을 ‘당신’이라 부른다.
마을신들은 그리스로마 신들이 올림포스 신전에 모여 회의를 하듯 일 년에 한 번 할로영산에 모여 회의를 한다. 신들이 다 하늘에 올라가고 지상에 하나도 남지 않은 이때, 사람들은 비로소 혹시 손이 날까 미루어 둔 이사나 집을 수리하기도 한다.

마을신들의 부모신, 백주또와 소천국

제주의 수많은 마을신들은 모두 백주또와 소천국의 후손들이다. 백주또와 소천국은 아들 여덟, 딸 스물여덟을 낳아 자손이 삼백일흔여덟인데, 그들이 온 제주 마을에 흩어져 각각 마을신이 되었다. 부모신인 백주또와 소천국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북제주 송당리는 마을신앙의 메카이자 뿌리인 셈이다.
백주또는 ‘백주’에 신을 뜻하는 ‘또’가 붙은 이름으로 백조 또는 금백조, 백주할망으로도 불린다. 제주신화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자상한 어머니신으로, 농사와 가정을 돌보는 신이다.
백주또는 제주 출신이 아니라 오늘날 중국 땅인 강남천자국에서 이주해 온 여성이다. 열다섯 나이에 점을 치니 남편감이 제주에 있다는 걸 알고 오곡 씨앗을 챙겨 바다를 건너왔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서울 남산의 송악 출신으로 스님의 아이를 배어 쫓겨나 제주 땅까지 왔다고 한다.)
소천국(또는 소로소천국)은 제주의 알(아래)송당 고부니마루 출신이다. 그는 떠돌아다니며 짐승을 잡는 사냥바치로 엄청난 대식가였다. 백주또가 찾아오자 혼인하여 먹성만큼이나 많은 자손을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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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도령, 궤네깃또 | 한겨레 출판사 (사진출처: 오픈키드)

부모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모색하기 마련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자 먹고사는 데 문제가 생겼다. 백주또는 떠돌아다니며 사냥하기보다는 마을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 것이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남편 소천국은 사냥 대신 소를 몰고 밭을 갈았다. 힘도 타고났지만 먹성도 타고난지라 점심으로만 밥 아홉 동이에 국 아홉 동이를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밭을 지나가면서 시장기나 면하게 밥 한술 얻어먹을 수 없냐고 물었다. 소천국은 스님이 먹으면 얼마나 먹겠냐 싶어 허락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하게 스님이 밥 아홉 동이와 국 아홉 동이를 모두 먹어치웠다. 할 수 없이 소천국은 밭을 갈던 소를 잡아먹었다. 자기 집 소로도 성에 차지 않아 이웃집 소까지 잡아다 배를 채웠다.

가족 이기주의보다 공동체 규범이 우선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주또는 몹시 화가 났다. 우리집 소를 잡아먹는 건 그럴 수 있다지만, 남의 집 소를 잡아먹은 건 소도둑이라 하여 별거를 선언했다. 땅을 가르고 물을 갈라 살림을 나누니 사실상 이혼이나 다름없었다. 소천국은 다시 농사 대신 사냥을 하고 첩까지 두었다. 백주또는 별거 당시 임신을 한 상태였는데, 뱃속 아기까지 건강하게 살림을 잘 꾸려나갔다. 그 아이가 훗날 영웅신 궤네깃또이다.

(다음에 궤네깃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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