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워하면 지는 건데, 나는 이미 이길 생각도 없었다

선거 결과 이후, 미국에 가고 싶다거나 미국이 좋다는 말이 쏙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역시 미국이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미국병” 걸린 환자들이 주변에 많은데, 우리 환우들이 병이 될 정도로 미국을 좋아했던 이유는 아마 비교적 경직되지 않은 문화, 다양성이 가능(해 보이기는) 한 조건, 비판하고 토론하고 수용하는 문화…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국을 좋아한다기보다는 부러워했던 것 같다. ‘와, 저게 된단 말이야?’ 그래서 뭐가 그리 부러운지를 좀 헤아려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그다지 즐겁지 않았던 세스 로건의 애니메이션 <소시지 파티>에서 주인공 소시지는 그가 온갖 식료품들 앞에서 연설을 할 때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유명한 대사 “Friends, Romans, countrymen, lend me your ears”를 패러디한다. 즐기지 못할 이유가 가득한 영화였지만 곳곳에 양념으로 뿌려진 문화적 레퍼런스들은 솔직히 부러웠다. 셰익스피어를 아무 데서고 끌어다 쓰며 가지고 노는 문화적 토양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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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비의 팬질을 끊은 건 이미 몇 해 전이지만, 모비는 몇 해 전에 놀라운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한다. 바로 인디 필름메이커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음원을 무료로 제공해 주는 것으로 mobygratis.com라는 사이트다. 독립영화와 비상업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저작권료 부담없이 사용하라고 150 개 이상의 트랙이 있다. 특정 양식을 채워서 제출하면 사용이 가능한 비교적 간단한 시스템. 거대 제작사, 투자자들이 내용까지 좌지우지하고 사람들이 보는 건 오로지 상업영화 블록버스터뿐인 요즘, 다양성과 창조성을 응원하는 모비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솔직히 엄청 부러운 일이다.

모비(mobygratis.com 메인 화면)

3.

J.J.에이브럼스는 <로스트> 이후에 너무나 잘 나가는 감독이자 프로듀서가 되셨는데, 최근의 <스타트렉>과 <스타워즈>도 모두 에이브럼스의 대중적 감성을 거친 작품들이다. 그런데 부러운 건 그게 아니고… 바로 JJ가 2013년에 출간한 책, S.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아직 그 책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엄청 강렬한 기억이었던가 보다. 이 책이 어떤 책이냐 하면 일종의 ‘독서경험’을 제공하는 책인데, 기본이 되는 책(Ship of Theseus)이 있고, 이 책의 내용과 작가를 둘러싼 두 친구의 대화와 모험이 책의 여백에 기록되어 있고, 엽서나 쪼가리 종이에 휘갈겨 적은 메모, 냅킨에 적은 글귀 등 역시 책 사이사이에 끼어 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을 따라 가는 책,이라고나 할까? 나는 역시 이 책이 나오고서 한없이 부러움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컨셉의 책이 가능했던 이유가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도서관을 제 집 드나들듯 하고, 서로가 읽은 내용을 가지고 친구와 논쟁도 하는, 이런 배경 속에서 JJ 에이브럼스와 공동저자 더그 도스트가 자랐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God Bless Nerd…무슨 일엔가 순수하게 몰입하고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s(사진출처: The New Yorker)

4.

<길모어 걸스>의 리부트 소식으로 타임라인이 시끄러웠던 게 이미 오래전 일이다. 대학 시절, 로리와 로리의 남자친구들에 내가 괜히 이입하며 나의 잉여시간을 불태운 미드 <길모어 걸스>. 이 작품은 워낙에 똑똑한 아이가 주인공인 탓도 있지만 극본을 쓰는 작가들 자체가 책을 많이 읽고 지적인 그룹이라는 인터뷰를 봤던 기억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도스토옙스키 등 고전에 대한 레퍼런스는 물론이고, 영화, 음악을 종횡으로 넘나드는 풍부한 레퍼런스들은 가끔 너무 잘난 척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보며 공부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하는 걸 보면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게 분명해, 저 책을 읽어야겠어, 저 영화를 봐야겠어… 하면서 리스트를 적어가곤 하던 스무살의 나.

길모어걸스

5.

내년 초에 엑스북스에서는 곧 작가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이 나온다. 올리버 색스, 에드워드 사이드, 해럴드 블룸, 치누아 아체베, 존 버거, 마틴 에이미스 등 쟁쟁한 작가들의 인터뷰집이다. 물론 수록된 작가들은 미국 출신자들만 있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서양문화, 서양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셰익스피어, 단테, 초서, 세르반테스, 제임스 조이스… 이런 걸 자유자재로 끌어와 이야기한다. 위대한 작가들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사유를 개진하는 툴로서 사용한다. 아… 너무 부러워서 절망적일 지경이었다. 미국의 소설가 E.L. 닥터로의 인터뷰 한 토막을 잠깐 보더라도..

“시와 소설을 읽고, 철학을 읽고 비평을 하는 연습과 교육이 없었다면 경험이 없었다면 글 쓰는 자신이, 작가로서의 제가 어떻게 구성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평을 참 잘 했습니다. 그게 우리의 스포츠였죠. 오하이오 주에서 풋볼을 하는 것처럼 케니언에서는 비평을 했습니다.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작가가, 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수사에 대해서 배웠지요. 예를 들면 라틴어 단어와 앵글로색슨 단어를 같이 쓰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또는 왜 어떤 비유는 고상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지 말입니다. 저는 언어 안에서 음악을 듣는 법을 배웠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랬는데, 애초에 이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상관이 없으므로 절망적으로 무력하게, 나는 이 서양의 지적 전통을 한없이 부러워하고야 말았다.

6.

결국 따지고 보면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계발시키는 교육, 그런 지적 전통이 살아 있는 서양의 어떤 한 부분, 문화예술의 중요성에 대한 높은 이해도 등으로 추려질 수 있겠다. 20년 가까이 부러워하며 살았던 나의 이 간절한(?) 부러움으로 나는 부지런히 책을 읽고 또 만들고, 읽기강의를 만들고 권하고 있다. 그리하여, 잘 쓰려면 잘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탄생한 두 수업이 바로 이것이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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